김성혜 개인전 Scar I Mention 2025.11.7 — 11.9 at. ppuq
전시 서문
<Slash, Ash, Slash, 획>
최영건
올 여름 나는 김성혜를 위해 시 몇 편을 번역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이었다. 시들은 김성혜의 패브릭 작품과 한 편씩 매치되었다. 그 협업 프로젝트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내가 번역한 시들 가운데 우리의 기억에 가장 깊숙이 남겨진 건 ‘A Slash of Blue’라는 첫 행을 가진 시였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에게는 제목이 따로 없다. 그래서 시의 첫 줄이 흔히 제목을 대신하곤 한다. 나는 ‘A Slash of Blue’라는 첫 줄을 ‘파랑 칼자국’으로 옮겼다. ‘푸른 선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짧은 시를 전부 암송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후로도 ‘slash’라는 말 조각이 여름의 자국처럼 남아 맴돌았다. 나는 ‘slash’라는 말 조각이 김성혜라는 작가와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 사실이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단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다 여름이 끝난 뒤 김성혜는 바뀐 계절과 함께, 찢고 터뜨리고 베어 가른 순간들을 가져왔다. 순간을 단단하게 만든 사물들을 내게 보여줬다. 덕분에 나는 바뀐 계절 속에서 다시금 ‘slash’라는 말 조각을 매만졌다.
보이지 않는 걸 베는 춤들을 안다. 고대 샤먼의 춤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베는 춤이자 세계와 세계 사이를 가르는 춤이었다. 동북 아시아에서는 무당과 사무라이, 문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고 베려 춤을 췄다. 인도의 나타라자(Nataraja)는 춤의 왕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다. 춤의 왕이 된 시바 신은 무기 없이 맨몸으로 세계를 자르고 벤다. 나타라자의 춤은 세계를 자르고 베어 새로운 진실을 열어젖힌다. 신의 춤이 아닌 병사들의 춤도 있다. 고대 그리스 병사들은 피릭키(fyrríkhē)라 불리는 춤을 췄다. 이들의 춤은 전투의 재현이자 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시가 건넨 ‘slash’라는 말 조각과 이런 몸짓들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 건, ‘slash’가 춤의 말이기도 한 까닭이다. 무언가를 잘라내는(to cut) 무용 동작을 뜻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발레의 쿠페(Coupeˊ)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베기와 가르기는 ‘cut’이 아닌 ‘slash’의 퍼포먼스여야만 한다. 돌연하고 종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본능적인 몸짓이기 때문이다. 루돌프 라반은 자신의 무용학 이론에서 ‘slash’를 다음 세 가지 요소의 조합으로 정의한다. ‘강한(strong)’, ‘sudden(급작스러운)’, ‘유연한(indirect)’. 이 세 요소는 슬래시(slash)가 예측가능하고 기계적이며 정확한 자르기인 컷(cut)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준다.
슬래시는 예측 불가능한 어느 지점에 폭발적이고 비정형적으로 터져나온다. 슬래시의 비정형성은 그것을 붙들어둔 도기의 표면에 자연물을 닮은 일그러짐을 가져온다. 김성혜가 붙들어 모습을 입힌 것은 그런 일그러진 타격이다. 그 꿈틀거리는 타격이 무채색의 재(ash)를 찢고 베어 열어 젖힌다. ‘ash’가 지닌 멸망이라는 의미는 극단적으로 생명이 소거된 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김성혜의 타격은 그런 아득한 멸망을 가르고 열어 젖힌다. 점토 덩어리를 밀대로 밀고, 스폰지로 다듬고, 칼로 그것을 가른다. 갈라진 부위를 벌려 주사기로 붉음을 주입한다. “Scar I Mention.” 나는 김성혜에게 그 붉음이 사람 몸의 붉음과는 선연히 다른 오렌지빛이라는 사실을 말한 적 있다. 김성혜에게서 돌아온 답은 살아 있는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타격을 기입하고 싶었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니 그가 슬래시를 기입하는 곳/것은 잿빛이어야 한다. 재란 으레 거기 살아 있는 것이 없음을 드러내는 징표인 까닭이다. 허공을 가르는 전투의 춤들이 그렇듯 김성혜가 베고 가른 상처는 재라는 소멸의 징표에 자리한다. 재를 갈라 빛 같고 화염 같은 붉음을 찾아내는 것, 나는 그의 작업을 그렇게 읽는다.
모든 말에겐 출발점이 있다. 슬래시라는 영단어는 베고 자르며 후려치는 등의 동작이자, ‘/’라는 기호다. 슬래시라는 영단어가 처음으로 글에 쓰인 것은 14세기 즈음이라고 한다. 전투와 타격을 담아낸 동사가 ‘/’ 기호로 연결된 것은 그 모양의 닮음 덕분이다. 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대각선 모양의 타격은 이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 그은 선의 형태로, 무수한 것들을 구분하고 연결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베고 열어 잇는다.
김성혜의 이번 전시를 마주하며 나는 그가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하는 데 변함없이 열중해왔다는 걸 느꼈다. 그게 우아하고 영롱한 환상이든, 돌연히 터져나오는 찢김과 일그러짐의 타격이든, 김성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붙든다. 도기는 모든 예술의 몸 가운데 가장 시간에 저항하는 미디어다. 우리는 파편이 되었거나 더러는 온전한 도기들이 영겁 같은 시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들에 익숙하다. 도기는 찰나의 실수로 산산조각나는 연약함과 시간의 중압을 견디는 꿋꿋함을 한 몸에 지닌다. 김성혜는 바로 그런 미디어를 슬래시의 순간의 증거로 삼는다. 고대의 신이 추었던 베고 가르는 춤은 세상을 갈라 열어젖히며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는 힘이었다. 슬래시의 획은 늘 그런 힘과 춤을 닮아 있다. 획, 이라는 말을 한국어로 소리내 발음할 때 내뱉고 호흡하게 되는 그것. 김성혜의 이번 전시에 깃든 호흡이다. |